VC 산업에도 유망주가 필요하다

VC씬에서 Emerging VC를 찾는 목소리가 멈추지 않는 이유

VC 산업에도 유망주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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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서는 생소한 개념이지만, 해외에서는 여전히 Emerging VC 혹은 Emerging Fund Manager를 찾는 목소리가 흔하게 들립니다. 대형 VC에 대한 선호가 지속적으로 늘어나는 것이 당연한 지금, 시장은 Emerging VC에게 무엇을 기대하고 있을까요?

감독님, 제가 뛸 시간이 있긴 한가요?

투자 산업은 프로스포츠 세계와 많이 닮아 있습니다. 플레이어들은 명확한 숫자와 성적으로 본인의 존재가치를 증명해야 하고, 이러한 가치 증명에 실패하면 안타깝게도 짐을 싸야 합니다.

좋은 성적과 노하우로 중무장한 전성기의 스타 플레이어들은 경기를 주름잡으며 주전 자리에서 비킬 생각을 하지 않죠. 반대로 기라성 같은 스타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이제 막 데뷔한 유망주들은 성적을 내기는 커녕, 출전 기회를 잡기도 쉽지 않습니다.

"진입할 틈이 있긴 한거야?"

VC 시장의 슈퍼스타인, 좋은 트랙레코드로 중무장한 유명 하우스에게는 출자하고 싶어하는 출자자와 투자 받고 싶어하는 스타트업이 줄을 섭니다. 이는 자연스럽게 다시 규모 있는 펀드 결성과 좋은 투자 성과로 이어질 확률을 높이고 한 번 굴리기 시작한 눈덩이의 크기는 점점 커져갑니다. 이러한 논리가 지배하는 VC 시장에서 이제 막 시작한 신생사가 이미 좋은 레코드와 브랜드를 갖고 있는 대형사를 이기기는 펀드레이징과 투자 모두 상당히 힘든 것이 사실입니다.

특히 지금과 같이 유동성이 말라있는 시장에서는 아무것도 증명한 게 없는 신생사가 펀드레이징을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실제로 최근 지속된 펀드 결성 실패로 인해 문을 닫는 하우스가 증가하는 현상은 미국한국을 가릴 것 없이 흔하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 와중에 신인을 기용한다고?

그런데 대형 하우스에 대한 선호도가 명시적으로 올라간 현재와 같은 상황에서도 역설적으로 신생사의 첫 펀드를 투자처로서 찾는 곳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신생사는 보통 Emerging VC, 첫 펀드를 만드는 VC 매니저는 Emerging fund manager라는 이름으로 불리곤 하는데, 녹록치 않은 시장 환경에서 이들을 찾는 것은 일견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아래 Pitchbook에서 2023년 중순 공개한 자료를 보시면 그 의아함은 더욱 커집니다.

Pitchbook은 3개 혹은 그 이하의 펀드를 결성한 VC 매니저를 Emerging manager, 그 이상의 경험이 있는 매니저를 Established manager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위 표는 2022년 3분기까지의 펀드 결성 년도별로 각 매니저 분류군의 TVPI 성과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TVPI는 Total Value to Paid-In Capital의 줄임말로, 펀드에서 출자자에게 실제로 회수된 가치와 투자 포트폴리오의 현재 기업가치의 합을 펀드 총액으로 나눈 값이며, 현재의 펀드성과를 나타내기 위해 흔하게 사용되는 지표입니다.

위 표에 따르면 Emerging manager는 최근 총 10개년도 중 3개년을 제외하면 대부분 연도에 Established manager에 비해 저조한 성과를 낸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한 표에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2007년부터 2009년까지 글로벌 금융 위기 당시에 결성된 펀드들은 0.31x 대 0.83x 수준으로, established manager의 성과가 훨씬 선방했습니다. 이사실을 감안하면 통념과 유사하게 전반적으로 emerging manager가 시장에서 베테랑을 능가하기는 어렵다고 말하는 것이 무리는 아닐 것입니다.

조금 더 자세하게 들여다보자

그런데 Pitchbook에서 2021년 작성한 아래 그래프를 보면 조금은 색다른 인사이트를 뽑아 볼 수 있습니다.

Pitchbook, 2021

왼쪽의 그래프는 하우스의 펀드 넘버에 따른 실패(IRR 0% 이하 펀드) or 대성공(IRR 25% 이상 펀드) 퍼포먼스 비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중 주목할 만한 점은 각 하우스에서 결성된 첫번째 펀드(First time fund) 군에서 펀드의 수익이 IRR 기준 25%를 상회하면서 큰 성공을 거두는 비율이 전체의 27.8% 수준으로 2호+ 펀드에 비해 눈에 띄게 높은 숫자를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른쪽의 그래프는 1호 펀드와 2호+ 펀드들의 사분위별 TVPI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를 보면 1호 펀드 중 상위 25%의 성과는 2호+ 펀드들의 같은 구간의 성과 대비 높은 투자수익을 거두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하위 25%의 성과는 아쉬운 것도 동시에 확인할 수 있죠.

Cambridge Associates, 2019

Cambridge Associates에서 작성한 위 그림은 2004년부터 2016년까지 미국의 전체 펀드 중 매년 상위 10위의 수익률을 기록한 펀드의 유형을 보여줍니다. 각 하우스의 1호펀드와 2호펀드를 의미하는 New fund의 비중이 대부분의 연도에서 가장 높은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즉, 가장 잘되는 펀드 중에는 Emerging VC의 펀드가 가장 많다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죠.

데이터의 집계 기관별 기준 및 시기, 데이터 누락 여부 등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위에 제시한 내용을 취합해보면 아래와 같은 추세의 결론에 도달해볼 수 있겠습니다.

  • 통념과 유사하게, 일반적으로는 신참 VC가 베테랑 VC에 비해 좋은 투자 성과를 낸다고 볼 수는 없다.
  • 하지만 신참 VC를 더 디테일하게 쪼개보면, 그 중 잘되는 펀드는 시장의 평균을 훨씬 상회한다. 시장에서 가장 높은 투자 수익률을 기록한 펀드 중 신참 VC의 비중 역시 유의미하게 높다. (반대로 하위권이 대차게 망할 확률도 높다..)

장투준님이 멱법칙을 소개하며 언급했듯이 VC 펀드의 수익률 급간은 원래 다른 투자 상품군에 비해 넓지만, Emerging VC에게는 더욱더 넓은 스펙트럼이 적용되는 것 같습니다.

VC, 벤처캐피탈이 정규분포를 부정해야하는 이유
벤처캐피탈. 영어로는 (ad)Venture Capital라고도 합니다. 전통적인 투자 자산들은 모험자본이라고 일컫어 지는 VC와 어떤 점이 다를까요? VC를 이해하기 위한 첫 발자국 Power law, 멱법칙을 알아봅시다.

'통상적으로 잘되기는 어렵고, 쪽박이면 망하지만, 대박이면 크게 터진다.'
보통 스타트업에 대한 투자와 VC 펀드에 대한 출자는 다른 기대수준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지만, 적어도 Emerging VC에 대한 출자는 스타트업에 대한 투자와 유사한 경향성을 가질 수 있겠습니다.

Emerging VC가 가끔은 더 높은 성과를 내는 이유

Emerging VC의 유형은 너무나 다양하기에 그 이유를 일원화하기는 어렵겠지만, Emerging VC가 높은 성과를 내는 이유에 대해서 제시되는 가설로는 아래와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상황과 기대수익률이 스타트업과 닮아 있는 것처럼 잘되는 Emerging VC의 이유들도 스타트업과 상당히 닮아있습니다.

1) '죽거나 살거나' 차원이 다른 동기부여

얼마나 훌륭한 창업자였든, 얼마나 잘하는 대형 하우스의 에이스였든, VC를 창업하여 첫 번째 펀드를 모으는 것은 어마어마하게 어렵습니다. 본인의 펀드를 운영하며 성공한 레코드는 첫 펀드를 일으키기 전까지는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죠.

그런데 첫 번째 펀드 운용을 실패한 매니저가 두 번째 펀드를 모으는 것은 차원이 다른 어려움일 것입니다. 이제는 망한 레코드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아무것도 없었으면 꿈이라도 팔지..") 그렇기에 첫 번째 펀드는 반드시 성공해야 합니다. Emerging VC는 한 번의 스트라이크면 아웃되는 타석에 서있는 것과 다름 없습니다.

너무 두루뭉술한 이유처럼 받아들여질 수 있지만, VC도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기에 동기부여만큼 중요한 것은 없을 겁니다.

2) 영혼까지 끌어모은 인맥

첫 번째 펀드의 조합원 명부에는 매니저가 그간 살아온 인생사가 담겨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스타트업 엔젤 투자는 3F(Family, Friends, Fools)에게 받으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한 초짜 매니저에게 돈을 맡길 사람은 가족과 친구들밖에 없을 것입니다.

인생을 갈아넣은 펀드를 망치고 싶은 매니저는 없을테죠. 역시나 엄청난 동기부여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 아들, 엄마 아빠 돈은 잘 굴리고 있지?"

3) 첫 번째가 중요한게 아니야. 작은게 중요한거지.

혹자는 1호 펀드의 성과가 좋은 이유로 '작은 펀드 사이즈'를 꼽기도 합니다. 1호 펀드는 자연스럽게 2호+ 펀드에 비해 작은 사이즈로 설정될 가능성이 높은데 (pitchbook 의 2023년 데이터 기준 미국 Emerging manager의 펀드 중앙값은 USD 35M 수준입니다.) 작은 사이즈 펀드 자체가 큰 펀드에 비해 높은 수익률로 이어질 확률이 높고, 1호 펀드의 수익률이 높은 것으로 비춰지는 것은 착시일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이와 관련하여서는 기회가 되면 낭투파를 통해 다시 다뤄보도록 하겠습니다. 혹시나 관심있을 분들을 위해 작은 펀드 사이즈의 높은 수익률과의 관계에 대해서 참고용으로 pattern ventures에서 발행한 아티클을 첨부합니다.)

4) Last but not least. 아무도 안하지만, 말 되는 접근 방식

VC의 투자 대상은 끊임없이 변화합니다. 새로운 기술과 시장이 열리고, 새로운 세대의 창업자가 등장합니다. 전혀 주목받지 못한 지역에서 스타트업이 등장하기도 하고, 산업의 생김새에 따라 새로운 투자 방법론이 요구되기도 합니다.

2024년에 새로 하우스를 만들고 1호 펀드를 조성하는 매니저가 Sequoia나 a16z의 투자 전략을 벤치마킹하겠다고 했을때, 이 펀드의 성공 가능성에 베팅하는 투자자는 아마 없을 것입니다.

Emerging VC가 생존하고 번영하기 위해서는 그만이 갖는 특장점을 극대화해야 할 것입니다. 매니저의 전문성과 관심분야를 투자 전략에 녹여 대형 펀드와의 경쟁을 회피하고, 높은 잠재력을 가졌지만 아무도 쉬이 접근하지 못하는 영역을 파고들어야 합니다. 피터틸의 교훈처럼 작은 시장을 독점해야 하는데 Emerging VC는 그럴만한 동기와 운신의 폭이 있습니다. 마치 스타트업처럼 말이죠.

한국의 Emerging VC를 찾아보자

매니저의 동기부여는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조명하기 어렵지만, 독특한 투자전략을 통해 성공 레코드를 만들어 낸 Emerging VC는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국내의 VC 중 제 기억을 스치는 첫 번째 사례는 '스프링캠프'입니다. 스프링캠프는 투자 대상 창업팀을 고르는 관점에서 아무도 하지 않던 전략을 택했습니다.

[청세] SNU밸리는 현실이 될까, 서울대입구역 벤처캐피탈 스프링캠프
여성경제신문이 연재하는 [청년이 보는 세상] 이번 편은 서울대 언론정보학과에 개설된 미래뉴스실습 강좌에 수강한 학부 학생들이 작성한 기사를 연재합니다. 전 중앙일보 논설위원이었던 양선희 미래뉴스실습 책임교수의 지도하에 한 학기 동안 취재하고 쓴 기사들입니다. 양 교수와 학생들은 ‘업커밍(Upcoming)’이란 잡지도 발행했습니다. 여성경제신문은 양 교수와 학생들의 동의 하에 학생들의 기사를 [청세]에 게재합니다. [편집자 주]스탠퍼드대를 중심으로 형성된 미국의 실리콘밸리. 서울대를 중심으로 한 SNU밸리. 너무 거창한 얘기일까. 물

2015년 설립된 스프링캠프는 '테헤란밸리(삼성~역삼)'로 상징되는 VC 밀집 지역을 아득히 벗어나 서울대입구에 사무실을 두었습니다. 서울대학교 학생창업팀에 대한 접근성을 높이기 위한 이 선택과 더불어 스프링캠프는 서울대학교 교내의 창업 관련 학회 및 동아리에 대한 지원을 하고, 예비 창업자들이 무료로 사용하면서 창업 준비를 할 수 있는 스프링라운지라는 공간을 운영하기도 했습니다.

통상적인 VC 입장에서 보면 다소 비효율적이라 판단할 수 있는 이 운영 전략들은, 궁극적으로 수아랩, 오늘의집과 같은 초기 서울대 학생창업팀을 필두로 비프로일레븐 등 지속적인 서울대 출신 스타트업 발굴의 교두보가 되었고 이는 당연히 상당한 투자 수익으로까지 이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초기에는 서울대학교를 공략한다는 아이디어에 공감하는 사람이 많지는 않았지만, 현재는 복수의 VC가 서울대입구역 근처에 오피스를 두고 있을 정도로 널리 받아들여지는 전략이 된 듯 합니다.

두 번째 사례로는 투자 산업과 투자 방법에서 남들과는 전혀 다른 노선을 택한 '해시드'를 꼽을 수 있겠습니다.

해시드, 1200억원 규모 벤처투자조합 펀드 결성 - 매일경제
블록체인 전문 투자사 해시드가 창업투자회사 해시드벤처스를 설립하고 1200억원 규모의 첫 펀드 ‘해시드 벤처투자조합1호’를 결성했다고 23일 밝혔다. 해시드는 지난 2017년부터 블록체인 투자사로 활동하면서 다수의 글로벌 블록체인

해시드는 2017년 설립 당시부터 블록체인 산업에 대한 투자를 진행하였고, 특히 프로토콜의 부가가치가 집중되는 토큰에 대해 직접 투자를 하면서 빠른 시일 내에 거대한 투자사로 거듭날 수 있었습니다. 영역적으로 집중도가 높았을 뿐 아니라, 통상적인 투자사가 다루지 않는 토큰이라는 asset class를 다루었기 때문에 산업이 성장했을 때의 투자수익을 직접적으로 흡수 할 수 있었습니다. 해시드가 가장 대단한 지점은 2018년 크립토 웨이브가 지난 후 차가운 겨울이 왔음에도, 모두가 떠나갈 때 집중 분야에 대한 투자를 놓지 않았고 NFT, P2E 게임, L2 체인 등 2020년 두 번째 웨이브를 휩쓸었던 테마를 가장 빠르게 잡았다는 점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해시드의 성공 이후로 많은 VC들이 크립토 영역에 진입하였지만, 업황의 변화와 equity 중심 투자의 asset class 한계로 인해 고배를 마신 곳도 다수 있습니다.

Emerging VC의 대의적 역할

이처럼 Emerging VC는 생존과 번영을 위해 스스로 가장 자신있으면서, 경쟁자들은 아무도 하지 않는 영역을 파고 들기 마련입니다. 이러한 시도 중에 소리소문 없이 사라지는 곳들도 다수 있겠지만 그 중 성공한 소수의 시도는 초기 주주나 출자자에게 다른 VC 펀드 대비 압도적으로 높은 수익을 가져다 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에 더해 거시적인 관점에서도 Emerging VC의 지속적인 등장은 새로운 창업 생태계를 만들어내고 산업의 혁신을 불러일으키는 효과까지 있다고 생각합니다.

미국에서는 많은 Emerging VC가 3대 창업지역(Bay Area, New York, Boston)에서 경쟁을 회피하기 위해 미국 내 타지역에 펀드를 설정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결국 창업 인프라에서 소외된 지역으로 자본을 재배치 시키며 창업 생태계를 형성하는 효과를 갖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위에 소개한 한국의 두 회사가 불러일으킨 나비효과를 직접 피부로 느끼기도 했습니다. 저는 2017년 당시 서울대학교 경영학회의 일원 입장에서 처음으로 스프링캠프를 만났는데, 당시부터 이어진 스프링캠프의 동아리 지원과 스프링라운지라는 창업공간은 서울대학교 학생 사회 내에서의 스타트업 창업에 대한 허들을 눈에 띄게 낮추었습니다. 또한 2018년에는 해시드 인큐베이팅 센터에 위치한 스타트업에서 근무를 했었는데, 당시 해시드가 지원하는 행사와 공간, 후원 등은 자연스럽게 많은 동나이대 친구들을 '블록체인 창업'으로 이끌어 갔습니다. 이와 같이 Emerging VC의 색다른 투자 전략들은 단순한 투자 수익 뿐만 아니라 해당 산업의 총체적인 성장을 이끄는 도화선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다음에 일어날 VC 산업의 혁신은 어떤 Emerging VC의 도전적인 행보와 함께 일어날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