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POP 산업은 방금 시작되었습니다

한국인에게 K-POP은 너무 지겨운 단어입니다. 하지만 본격적인 K-POP의 글로벌 산업화는 이제 시작된 듯 합니다.

K-POP 산업은 방금 시작되었습니다

다른 글들을 통해 여러 번 언급한 적 있지만 저는 K-POP 산업을 굉장히 좋아합니다. K-POP 산업은 제가 좋아하는 '음악 산업'과 제가 또한 좋아하는 '크리에이터/팬덤 산업'의 교차점에 있기 때문입니다. 두 시장의 성장 요소를 동시에 취하고 있기에 규모는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고, 아이돌 음악 애호가로서 투자 검토 행위 자체가 즐거운 것은 덤입니다 :)

그런데 종종 다른 투자자 및 이해관계자와 얘기하다 보면 K-POP 과 관련해서 편견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K-POP 은 어차피 아티스트 운빨 아니야?"
"하이브 & 대형 기획사가 다 먹은 시장 아니야?"
"아직도 K-POP?"

K-POP은 등장한 지 20년이 넘은 단어이고, 싸이가 강남스타일을 낸 지도 어언 10년이 넘었기에 국내에서 K-POP은 지겨운 단어입니다. 또 그렇기에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K-POP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만큼 오해와 편견이 쌓이기도 쉽죠.

제가 보고 있는 K-POP 산업의 현주소와 투자 포인트를 정리해 보았습니다.

K-POP은 3년 된 신생 시장

먼저 그래프 하나를 보시죠.

피지컬 앨범 상위 400 판매량 (써클차트)

위 차트는 써클차트(구 가온차트)에서 집계한 연간 피지컬 앨범 판매량(출고 기준) 추이입니다. 국내에서 생산되어 국내 및 해외에 판매된 양을 집계하는 그래프이죠. CD/LP/Tape 등 물리적 매체를 음원 유통의 매개체로 사용하면 피지컬 앨범으로 집계가 되는데 2019년에는 2,500만 장 수준이었던 판매량이 2022년 7,700만 장 수준으로 불과 3년 만에 3배 이상 증가하였습니다.  

앨범 장 당 가격이 출고가(=판매처 매입가) 기준으로는 10,000원 수준, 소비자 판매가 기준으로는 최소 13,000원~최대 30,000원 수준임을 고려할 때, K-POP 피지컬 음반 시장은 1조 원을 훌쩍 넘는 시장 규모를 이미 달성하고 있습니다. 국내에서 조 단위 규모를 형성하면서 동시에 연간 성장률 30%대를 기록하고 있는 시장은 쉽게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작년 K팝 음반 수출액 사상 최대…3천억원 육박 | 연합뉴스
(서울=연합뉴스) 이태수 기자 = K팝 시장 호황이 이어지면서 지난해 음반 수출액이 3천억원에 육박해 사상 최고치를 경신한 것으로 나타났다.

같은 기간 K-POP 음반 수출액 역시 매년 역대 최고를 경신하고 있습니다. 일본, 중국, 미국이 차례대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데, 해외에서 유통되는 음반은 많은 경우 '보따리꾼'으로 불리는 비공인 도매상을 거치는 경우가 많은 점을 고려하면 실질적인 시장 규모는 더욱 클 것으로 예상됩니다.

글로벌 음원 시장 규모 추이(IFPI)

재밌는 점은 음악 산업의 관점에서 국내 음반 산업은 글로벌 트렌드를 역행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2000년 이후 디지털 불법 유통 암흑기와 스트리밍 플랫폼을 중심으로 한 음악산업의 재부흥기를 거치는 동안 글로벌 피지컬 음반 시장은 꾸준하게 축소되어 왔습니다. 국내 음반 판매량 그래프와는 정반대의 기울기를 보여주고 있죠.

K-POP 피지컬 앨범의 의미

K-POP 산업에 있어 피지컬 앨범은 '음원 유통의 매개체'이자 '아티스트-팬 관계의 매개체'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는 독특한 재화입니다. 물론 음원 유통의 매개체로서의 의미도 아티스트-팬 관계에서부터 출발합니다.

1) 팬덤의 자존심 대결 : Chart-In

피지컬 앨범은 상시 판매되는 소비재라기보다는 각 아티스트의 컴백 일정에 맞추어 한시적으로 드랍되는 한정재화의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아이돌 팬덤은 앨범이 출시하는 시기에 맞추어 소위 '화력을 집중시키는 작업'을 하게 되는데, 이는 발매 후 일주일간 판매량을 의미하는 초동을 띄우기 위함입니다.  '초동 백만장'과 같은 상징적인 지표가 있기도 하지만, 이는 판매량을 집계하는 메인 차트에 올라가기 위한 목적이 가장 큽니다.

미국에서는 빌보드 200 차트(메인 앨범 차트), 한국에서는 한터차트 등이 직접적으로 주간 앨범 판매량을 집계하고 있고, 이와 같은 데이터를 바탕으로 작성되는 파생차트들 역시 존재합니다. 팬덤 입장에서는 이러한 차트에 최애 아이돌이 들어갈 수 있는지 여부가 아티스트의 밸류와 결부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기에 발매주간 앨범 구매를 집중시키며 상위 랭크를 기록할 수 있도록 커뮤니티가 활성화 되곤 합니다.

대표적으로 하이브의 데뷔 4년차 보이그룹 TXT (투모로우 바이 투게더)가 지난 주 미국에서만 약 16만 장의 피지컬 앨범을 판매하며 빌보드 200 1위에 등극하였는데 이는 BTS, 슈퍼엠, 스트레이키즈, 블랙핑크에 이어 5번째 기록으로, 지속적으로 새로운 아티스트가 등장하며 해외 팬덤이 커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TXT, 빌보드 앨범 차트 1위…K팝 그룹서 다섯 번째(종합) | 연합뉴스
(서울=연합뉴스) 이태수 안정훈 기자 = 그룹 투모로우바이투게더(TXT)가 다섯 번째 미니음반 ‘이름의 장 : 템프테이션(TEMPTATION)’...

즉, K-POP 팬덤의 음반 구매는 음원을 듣기 위한 매체를 구매하기 위한 목적보다는 Chart-in 자체가 목적이 되는 신기한 현상이 발생하고 있고, 이러한 다분히 '한국적인 현상'이 대중음악의 본토인 미국의 주류문화에도 스며들고 있는 상황입니다.

2) 소유 맥락의 다양화 : 포토카드 '가챠', 팬미팅 입장 티켓, 수집품

피지컬 앨범은 단순히 음원의 유통 매체 역할만 수행하지 않습니다. K-POP 앨범의 유통 방식은 굉장히 다양한 Gamification 요소를 담고 있습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이 포토카드 '가챠'입니다.

가챠는 주로 게임에서 랜덤 뽑기 요소가 있는 과금 모델을 칭하는 은어입니다. K-POP 앨범은 CD와 함께 포토카드를 패키지에 포함하는데 포토카드는 일반적으로 그룹 멤버들 중 1인을 랜덤으로 집어넣습니다. 아이돌 팬덤은 일반적으로 그룹에서 한 명의 최애 멤버를 갖고 있기 마련인데, 본인 최애 포토카드를 획득할 때까지 앨범을 구매하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온라인/오프라인 팬미팅에 참석할 수 있는 확률을 앨범 구매와 연동 시키기도 합니다. 앨범 내 코드를 삽입하여 많이 구매할 수록 팬미팅 참석 가능성을 높여주는 형태의 이벤트를 함께 하는 식이죠.

각 지역별, 유통처별, 시기별 특별 버전을 별도 제작하면서 한정재화의 성격을 강화하여 수집품의 성격으로 변모시키는 것도 앨범 판매를 촉진하는 방법 중 하나입니다. 멤버들이 사인한 한정판 앨범을 파는 것은 당연하고요.

이렇듯 해외 음악 시장에서는 흔하게 보기는 어려운 소위 과금요소들이 피지컬 앨범 판매에 숨어 있는데, 아티스트-팬덤 관계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역학구조이기 때문에 해외의 팬들도 한국 팬덤처럼 똑같은 방식의 구매 행위를 빠르게 늘려가고 있습니다. 이처럼 K-POP 피지컬 앨범은 전세계 아무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 소비 맥락을 더하며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고 있는 구심점입니다.

음원/음반 유통구조 : New Consumers & Old Players

저는 'New Consumers & Old Players' 의 성격을 가진 시장에서 빠르게 변화하는 시장 수요에 기민하게 반응하는 스타트업이 폭발적으로 성장할 기회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는 VC 산업도 그런 시장 중 하나라 생각하고요)

현재의 K-POP 시장은 'New Consumers & Old Players'에 정확히 부합하는 시장입니다. 우선, 글로벌 K-POP 팬덤이라는 새로운 고객층이 최근에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틱톡 등 영상 플랫폼과 유튜브 뮤직, 스포티파이 등 스트리밍 플랫폼이 글로벌 전역에 확산되면서 K-POP 음악을 접하기는 정말 쉬워졌고, 2020년 BTS의 폭발적인 성장에 힘입어 K-POP 매니아들이 서브컬쳐를 좋아하는 오타쿠에서 주류 음악 장르를 즐기는 사람으로 변모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K-POP 아티스트/매니지먼트사와 팬덤 사이에서의 유통 비즈니스는 내수 산업을 기반으로 한 국내 대기업이 장악하고 있습니다. 음반과 음원 유통 시장 별로 점유율 추이는 다르지만, 두 시장 모두 드리머스, YG Plus, 카카오 엔터테인먼트, 지니뮤직 4사가 90% 이상 장악하고 있는 과점 시장 입니다.

유통 4사 중 YG Plus는 YG 엔터테인먼트 산하의 상장사로 YG와 HYBE의 물량을 모두 소화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기획사 입장에서 수직계열화를 한 상황이죠.

나머지 3사는 모두 유사한 형태입니다.

  • 드림어스컴퍼니(구 아이리버)는 현재 SK 계열사로 스트리밍 서비스 'FLO'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 카카오 엔터테인먼트(구 로엔)는 카카오 계열사로 스트리밍 서비스 '멜론'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 지니 뮤직은 KT의 손자회사이자 CJ ENM이 2대 주주로 있는 회사로, 스트리밍 서비스 '지니'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대기업 계열 유통 3사는 대기업 자본과 각기 운영하고 있는 스트리밍 서비스의 파워를 바탕으로 YG, 하이브를 제외한 기획사의 아티스트 음원 및 음반 유통 권리 계약을 진행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예를 들어 JYP 엔믹스의 유통은 드림어스가, KQ 에이티즈의 유통은 지니뮤직이, IST 더보이즈의 유통은 카카오엔터테인먼트가 각기 독점적으로 담당하는 형태이죠.

유통사는 디지털 음원 유통과 피지컬 음원 유통에 대한 권리를 일괄적으로 가져가는데 스트리밍 플랫폼에 디지털 음원을 공급하는 활동과 예스24, 교보문고 등 음반 판매처에 피지컬 앨범을 공급하는 활동을 하게 됩니다.

국내 스트리밍 서비스 점유율에서 멜론을 추월한 유튜브 뮤직

그런데 현재의 급변하는 시장 상황에서 이러한 전통적인 구조는 문제를 발생시키고 있습니다. 첫 번째로 위 그래프에서 볼 수 있듯이 글로벌 플랫폼이 확산됨에 따라 국내 스트리밍 사업자의 소비자 대상 영향력이 감소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2022년 4분기 유튜브 프리미엄 결합 상품의 힘을 등에 업은 유튜브 뮤직이 전통적인 1위 사업자 멜론의 MAU를 추월했습니다. 2020년까지만 하더라도 각 유통사와 연결되어 있던 멜론, 지니, 플로가 1~3위를 차지하고 있었기에 기획사에서 이들과 유통계약을 체결하는 것에 큰 문제가 없었던 것과는 달리, 이제는 해외 플레이어의 영향력이 증대되면서 대기업 계열 유통사에게만 의존하는 것은 시장의 성장성을 충분히 흡수하지 못하는 상황이 된거죠.

두 번째로 피지컬 음반 유통에 있어서는 국내 대기업 계열 유통사의 한계가 더욱 명확합니다.  피지컬 음반 유통은 결국 각 국가별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주요 국가별 거점을 중심으로 구성되고, 물류 시스템 및 판매처 네트워크 구축 등 현지 비즈니스가 필요하지만 국내 유통사는 이러한 충분한 준비를 하지 못한 상황인 듯 합니다. '국내 생산 to 국내 유통'으로 구성되어 있던 과거 음반 시장은 판매자와 구매자가 뻔했기에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여지가 없었지만, 글로벌 시장이 빠른 속도로 개화되면서 중간에 빈틈이 벌어지고 있는 형국입니다.

물론 Sony, Warner, Universal 등 주요 현지 유통사와 계약하는 방법이 있지만, 이 3사는  전세계 음악 유통 시장의 60%를 장악하고 있는 거대기업이기에 물량이 확보되는 플레이어 위주로만 계약을 진행합니다. 국내에서는 하이브가 BTS의 물량을 기반으로 대다수 아티스트에 대해 Universal music과 계약하였고, 그 외 기획사는 아티스트별 별도 계약을 맺고 있는데 이는 4대 기획사의 주요 아이돌에게만 한정되는 기회입니다. 또 현지 플레이어가 위에서 설명한 독특한 K-POP 유통 방식만의 감성과 문화를 정확히 구현할 수 있을지도 남겨진 과제입니다.

결국 투자 기회는 글로벌 K-POP 소비자의 폭발적 증가와 국내 내수 중심 대기업의 미진한 대응 사이에서 발생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우선 글로벌 시장에서의 K-POP 유통 역량을 가진 기업에게서 일차적인 기회가 발견될 것으로 예상합니다. 그 이후에는 국내 대기업의 유통망에 의존하지 않아도 되는 글로벌향 기획사 및 제작사에게서 기존에 볼 수 없었던 형태의 음원 제작, 아티스트 제작, 매니지먼트 형태가 만들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국내 대기업이 제작하고 국내 대기업이 유통하고 국내 대기업이 판매하는 뻔한 산업의 구도는 글로벌 시장과 함께 균열이 생기고 있고, "글로벌" K-POP 산업은 이제 막 출발하기 시작했습니다.


깨알 홍보: Hello82!

저는 위와 같은 맥락에서 Hell082 브랜드로 글로벌 K-POP 유통 사업을 전개하는 KAI Media의 시리즈 A 라운드에 리드 투자하였습니다.  KAI Media는 유튜브/틱톡 영상 콘텐츠에서 출발하여, 현재는 북미/유럽 지역의 음반 & MD 유통 및 현지 행사 등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정말 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무려 10개월이 걸려 2022년 투자를 했는데, 그 이후 1년이 안되는 기간 동안 KAI Media는 ATEEZ라는 보이그룹을 빌보드 200 3위와 7위에 두 번 올려놓았고 매출은 약 4배 상승하였습니다. 올해에는 더욱 더 의미 있고 큰 프로젝트를 진행할 예정인데, 최근에는 저와 함께 국내 음악 업계 최초 & 국내 VC 업계 최초의 실험을 기획하고 진행하고 있습니다. 아직은 말씀 드리기 이르지만, 종종 급변하는 음악 산업에서 어떠한 기회를 발견하고 있는지 낭투파 아티클을 통해 공유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많이 기대해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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