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전국 100등인데, 그게 중요한 건 아니야

낭만투자파트너스의 김성입니다. 제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사건과 생각들에 대해 적어보았습니다.

난 전국 100등인데, 그게 중요한 건 아니야
Photo by Thom Holmes / Unsplash

이 글은 저에 대해 궁금한 혹은 궁금해질 극소수의 사람들을 위한 자기 소개글이자, 그래도 꽤 치열하게 살고 있는 제 인생을 위한 응원의 글입니다. 30년 남짓의 기간 동안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사건과 생각에 대해 세 편에 걸쳐 적어보았습니다.

#1. 당당함에 대하여

2012년 초 겨울은 정말 아무 것도 안하고 누워서 보냈다. 세상의 모든 불운이 나에게 쏟아졌다고 생각했다.
당연히 수능이 끝나면 대학에 가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꼭 그런 것은 아닐 수 있다는 걸 알았을 때, 나는 인생의 실패를 감당할 준비가 안되어 있었다. 절반의 우울증 상태로 이불 안에 누워있다 보니 겨울이 거의 지나갔다.

2012년 2월 13일에 재수 학원에 들어갔다.(아직도 정확한 날짜를 기억하는 걸 보면 중요한 사건은 맞나 보다) 그 동안 정말 많이 봤다고 생각한 교과서를 다시 꺼내 들고 두 번째 수험 생활을 시작했다.

공부가 어렵지는 않았다. 고3 때도 나름 열심히 했으니깐. 하지만 재수의 진짜 힘든 점은 다른 곳에 있었다.

"아무리 열심히 해봤자 운 나쁘면 끝이야. 나는 전교 1등도 했던 놈인데, 운 앞에서는 이렇게 부질없잖아."

이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질 않았다. 운이 나빠 안 좋은 결과를 받았다고 생각하니 열심히 공부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다고 1년을 유야무야 보내면서 올해 수능 당일에는 운이 좋길 기도하고 앉아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생각의 방향을 바꿔야 했다.

이렇게 생각했다.

1) 만약 이 세상을 관장하는 신이 있다면,
2) 만약 내가 전국 70만 명 수험생 중 가장 열심히 하는 사람이라면,
3) 그리고 그 신이 조금이라도 자비가 있다면,
올해 수능도 망치는 것은 너무 가혹한 일이지 않겠는가.

1번과 3번은 내가 컨트롤 할 수 없는 조건이었다. 내가 컨트롤 할 수 있는 것은 2번 뿐이었다. 만약 70만 명 중 노력 1등인데도 불구하고 수능을 망치면, 과격한 얘기지만, 자살해도 된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세상은 불공평하고 정의롭지 않아 살 가치가 없으니.

그런데 내가 제일 열심히 하고 있다는 것은 어떻게 알지? 70만명을 감시할 수도 없는데?
내가 1등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 밖에 없었다. 올해의 나보다 열심히 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 그래서 나는 수많은 룰을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 공부 시간에 단 1초도 졸지 말 것
  • 공부 시간에 단 1초도 의자에서 엉덩이 떼지 말 것
  • 절대로 인터넷에 접속하지 말 것
  • 절대로 TV 화면을 보지 말 것
  • 절대로 누구에게도 먼저 연락하지 말 것. 학원에 있는 동안 휴대폰은 무조건 켜지 말 것
  • 매일 똑같은 루틴으로 자고 일어날 것
  • 아무리 힘들고 아파도 무조건 지킬 것

미친 사람처럼 위 규칙들을 지켰다. 10초 졸면 가상의 전국 1등보다 10초 뒤처진다고 생각했다. 1분 동안 화장실 갔다 오면 1분 뒤처진다고 생각했다. 눈 앞에 잔상이 남는 게 싫어 식당에서는 TV를 등지고 앉았고, 잡생각이 침투하는 게 싫어 인터넷에 한 번도 들어가지 않았다.

몸에는 소화 불량이 쌓이고 있었고, 머리에는 정신병에 가까운 강박이 들어차고 있었지만 물러설 수 없었다. 수능 날 걸어 나오면서 '나는 진짜 할만큼 했어. 어차피 이것보다 더 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라고 말해야 했다. 실제로 267일 수험 생활이 끝났을 때, 단 1초도 되돌리고 싶은 순간이 없었다.


2012년 11월 수능 고사장을 걸어 나오는 그 당시의 찬 공기와 머리 속으로 자연스럽게 스며든 생각은 10년이 지난 아직까지도 선명하다.

"아, 모르겠다. 다 틀렸을 수도 있을 것 같아. 근데 진짜 완벽했다. 267일의 과정이 정말 완벽했어. 결과는 망해도 상관없어.  내 인생의 주인이 되는 기분은 이런 거구나."

결과는 전국 100등. 주변에서는 만점 아니어서 아쉽다는 소리도 나왔는데,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중요한 건 이 과정을 통해 깨달은 두 가지 사실이었다.

첫째, '나는 멋진 과정을 만들 줄 아는 사람이다.' 내가 설계하지 않은 삶을 살았던 과거의 자신이 비굴하게 느껴졌다. 스스로 계획하고, 스스로 약속을 지키는 삶의 당당함은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는 크기로 다가왔다. 이거구나.

둘째, '망해도 상관없어. 근데 안 망해'.  운 하나로 인생이 좌지우지 될 수 있다고 한 19살의 내 생각은 대충대충 살고 있던 인생에 대한 자기 방어에 불과했다. 과정이 멋지면 결과가 좋지 않아도 상관없다. 그런데 과정이 멋지면 좋은 결과는 당연히 따라온다.


2013년 봄, 수능 잘 봤으니 취업 잘되는 상경계열에 지원하라는 주변의 조언을 뒤로 하고, 서울대학교 인문대학에 입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