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 VC의 유통기한

철도는 투자은행을 만들었고, 인터넷은 VC를 만들었다. AI는?

AI 시대, VC의 유통기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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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돈의 AI 시대입니다. 누군가에게는 인생일대의 기회이고, 누군가에게는 엄청난 위기일테지요. 어쩌다 마주친 산업 혁명, 자본은 어떻게 흘러야 할까요?

지금 당연한 것들도 언젠가는 혁신이었다

현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는 자본주의가 마치 태초부터 존재한 것처럼 느껴지곤 합니다. 하지만 현실에 도래한 자본주의의 역사는 채 300년도 되지 않습니다. 프랑스혁명과 영국 산업혁명 사이에서 증기기관, 방적기와 공장시스템의 소유이라는 당대의 가장 비싼 문제를 푸는 과정에서 적용된 시스템이니까요.

자본을 움직이는 방식들, 예를 들어 투자은행이나 벤처캐피탈도 마치 영원히 그 자리에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을 줄 때가 많지만, 이 모든 표준들은 사실 하나하나 당대의 가장 비싼 문제에 대한 혁신적 자본가의 대답이었습니다.

그럼 이제 AI가 촉발한 격동의 시기, 자본은 새로운 시대를 맞이할 준비가 되었을까요?

'어디에'가 아니라 '어떻게'

투자는 '자본을 어디에 배치하는가'라는 질문의 끝에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테마나 내러티브를 타고 움직이는 경우에는 이러한 경향성이 더 뚜렷합니다. 지금 AI가 (버블인지 아닌지를 떠나) '다음 무언가'가 되고 있는 상황에서도 투자 대상으로만 여겨지는 모습을 많이 보곤 합니다. 상장주식 투자자는 종목을 고르고, VC는 AI 스타트업을 소싱합니다.

하지만 어떤 기술 혁신은 자본을 '어떻게' 배치시키는지에 대한 질문을 제기합니다. 특히 산업혁명의 전초전에서는 이러한 사고가 훨씬 중요합니다.

지난 주, 제 개인 블로그 The Future Mundane에 발행한 글에서 산업혁명은 위의 세 가지의 흐름을 거쳐 완성된다고 언급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술 혁신에 의한 생산 수단의 등장만 이야기하지만, 사실 더 중요한 것은 '생산 구조의 변경'입니다. 어떤 기술은 기업가 상, 일하는 방식, 기업의 법적/행정적 구조, 자본의 흐름을 모두 바꿔 놓거든요. 그리고 이러한 생산 구조의 변화는 다가오는 미래의 계급 구조를 바꿔놓는 사회적 변화로 이어집니다. 이때 비로소 산업혁명이 완성됩니다.

생산 구조는 아래와 같은 것들을 지칭합니다.

기업 구조 : 기업의 법적/행정적 구조, 조직구조 등
노동 방식 : 노동자의 일하는 방식 및 팀의 협업 방식 등
기업가 상 : 전문 경영인, 기술 엘리트 등
자본 구조 : 자본 조달 및 집행 방식, 투자 대상 등

생산 구조, 쉽게 말해 기업의 생김새가 바뀌면 그에 결부되어 자본이 운용되는 방식은 변화합니다. 위에서 언급한 혁신적 자본가들이 등장하는 타이밍입니다. 이들은 기술 혁신의 선봉장은 아니지만, 선진적 자본 배치를 통해 초과수익을 획득하고 새로운 질서 하에서의 상위 계급을 부여받아 왔습니다.

철도와 철강의 발명품 : 주식회사와 투자은행

현대 경제 체제의 표준으로 여겨지는 '주식회사'는 사실 약 150여년 전이었던 2차 산업혁명기에서야 보편화된 개념입니다. 2차 산업혁명은 철도, 철강, 정유, 자동차와 같은 중공업 및 기계 중심의 산업이 미국을 중심으로 꽃 피웠던 사건입니다. 록펠러, 포드, JP 모건 같은 이름이 상징하는 시기죠.

그런데 문제는 철도나 철강 같은 중공업은 천문학적인 자본을 필요로 했다는 점입니다. 미국의 동서부를 횡단하는 철도를 깔기 위해서는 국가예산 급의 자본이 있어야만 했죠. 이 때, 17세기 대항해시대의 발명품이었던 주식회사가 새로운 생산구조의 대안으로 등장합니다. 주식회사는 유한책임의 형태로 회사의 소유권을 외부로 판매하면서 다른 사람의 자본을 조달할 수 있는 구조를 가능하게 했습니다. 가족 기업의 공장 소유 중심으로 돌아가던 1차 산업혁명기와는 전혀 다른 기업구조가 등장한 것입니다. 타인 자본의 조달은 기업 내부적으로는 소유와 경영의 분리로 자연스럽게 이어졌고, 전문경영인과 화이트칼라 직종이 새로운 직군으로 주목받기 시작했습니다.

Men who built USA (JP 모건, 카네기, 록펠러, 반더빌트)

주식회사 중심의 생산 구조는 자본시장에서 투자 은행이라는 표준의 등장으로 이어졌습니다. 대표적으로 J.P 모건은 사업의 위험으로 인해 시중은행에서 자금을 조달받기 어려웠던 철도사업의 주식과 채권을 유럽 자본을 기반으로 인수하면서 현대적인 인수금융의 초석이 다져졌습니다. 그리고 이사회를 장악하며 실질적인 경영을 이끌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여지는 생산구조(주식회사, 전문 경영인과 사무직)와 자본구조(투자은행, 트러스트)는 모두 새로운 기술을 받아들이고 산업 흐름을 주도하기 위한 흐름 하에 발명된 산물입니다. 그리고 모두가 아는 것처럼 생산구조와 자본운용의 새로운 질서를 주도한 이들은 새로운 브루주아지가 되었습니다.

인터넷과 SW의 발명품 : 스타트업과 VC

1990년대 미국 서부에서 시작된 3차 산업 혁명은 기존의 주식회사와 투자은행이 담지 못하는 생산수단을 소유 위한 해결책들을 제시하기 시작했습니다. 인터넷 기업과 소프트웨어 기업은 든든한 철도나 기계설비 같은 담보물은 없이 사람과 코드만으로 운영되는 구조로 짜여졌습니다. 망하면 노트북 몇 대 남는게 전부였죠.

하지만 인터넷을 통해 네트워크 효과를 구축할 경우, 모건처럼 천문학적인 돈으로 인수합병을 하지 않아도, 1위 플레이어가 되었을 때 획득할 수 있는 잉여이득의 크기는 엄청났습니다. 또한 소프트웨어는 한계생산비용이 0이었기에 뒤로 갈수록 이익률이 커지는 구조를 제시할 수 있었죠.

이와 같은 생산 수단의 등장은 주식회사 중에서도 스타트업이라는 생산 구조를 표준으로 만들었습니다. 스타트업은 자산이 없기 때문에 창업자와 사람이 가장 중요합니다. 특히 기술적 이해도가 높은 사람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초기에는 인건비를 중심으로 한 투자가 많이 필요하고, death valley라는 적자 구간을 견뎌야 합니다. 그러나 소프트웨어와 네트워크의 특성으로 인해 1위 사업자로서 시간이 지나면 압도적으로 적은 비용으로 확장을 지속할 수 있습니다.

스타트업이라는 독특한 생산 구조는 벤처캐피탈이라는 금융기법을 자본 시장의 대안으로 제시했습니다. 20세기 중반부터 기술 창업자를 중심으로 high risk high return의 구조로 투자를 하던 VC는 1990년대 닷컴기업들의 시가총액 상승과 함께 주류로 올라서게 됩니다.

VC는 창업자, 그리고 기술인력들을 가장 중요한 자산으로 보고 투자를 집행했습니다. 1972년 세콰이어부터 시작된 흐름이지만, 2000년대들어 닷컴의 주역들이 a16z(마크 안데르센, 벤 호로위츠), founders fund(피터 틸), khosla ventures(비노드 코슬라) 등을 설립하며 창업자 중심주의를 통해 이 흐름을 가속시켰습니다. 또한 테크 중심 사회를 외치며 기술 창업자 혹은 기술 인력들에 대한 무게추를 더욱 강화시켰습니다.

VC는 스타트업의 데스밸리 구조 또한 금융기법으로 녹였습니다. 회사가 적자일때에도 별도의 KPI, 특히 트래픽을 중심으로 한 지표를 통해 회사의 성장성을 측정할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CAC/LTV 구조를 기반으로 자금을 집행하였습니다. 트래픽을 모으면 후에 확보된 고객으로부터 매출을 발생시킬 수 있다는 계산 하에 적자 기업에게 지속적으로 천문학적인 돈을 붓는 구조를 만들었습니다.

동시에 기업이 망하는 가능성에 대해서는 더 열어두었는데, 포트폴리오 분산과 펀드 만기의 장기 설정을 통해 하나의 대박 포트폴리오가 나머지 모든 실패를 먹여살리는 구조를 만들었습니다.

AI는 생산 구조를 바꾸고 있는가?

2차 산업혁명기와 3차 산업혁명기는 모두 새로운 생산수단이 등장하며 그에 결부하여 생산구조가 변경되었고, 다시 그에 결부하여 자본 운용의 방법론이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AI가 새로운 자본을 필요로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정확한 답은 아직 모르겠지만, 그 힌트를 얻기 위해서는 AI 라는 새로운 생산수단이 새로운 구조를 낳고 있는지 살펴보는게 중요합니다.

노동 방식 

가장 자명하게 달라지고 있는 지점은 일하는 방식, 워크플로우입니다. AI 기업들은 End-to-End 형태의 업무 방식을 채택하는 곳이 압도적으로 많아지고 있습니다. 담당자 한 명이 데이터부터 고객경험까지 책임지고 운영하는 것이죠. 과거에는 각자 전문성 있는 영역을 담당하고, 다른 영역은 다른 전문가와 협업하는 구조로 움직였다면 현재는 모두가 모든 일을 처리하면서 협응력이 더 중요해진 상태에 도달하고 있습니다.

또한 AI Native 기업들은 모든 문제풀이를 AI를 사용하는 것을 원칙으로 내세우는 곳들도 많은데, 이러한 철학하에 사용 토큰 수를 인사평가의 기준으로 잡는 곳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기업 구조 

​End-to-End 업무 구조는 전문성 기반의 협업 중심 조직 구조를 해체하고 있습니다. 5년 전에 통상적으로 IT 회사를 만든다고 하면, PM, 백엔드, 프론트엔드, 디자이너 등으로 구성된 5인~9인 팀을 조성하는 것이 가장 정석적인 조직구조였습니다. 하지만 End-to-End 업무 방식에서는 기능 중심의 조직이 와해되고 있습니다. 극소수의 전문가가 기능별 방향성을 제시하고, 모든 인원이 모든 일을 수행하는 구조로 변경되고 있죠. 조직에 필요한 인력의 수와 인력의 정의가 모두 변경되고 있습니다.

기업가 상 

이전 시대에는 단일한 문제에 극도로 몰입하고 빠른 속도로 실행에 옮겨 시장 내에서 앞서가는 기업가가 헤게모니를 쥘 확률이 높았습니다. 물론 기업의 빠른 실행이 중요하다는 점은 달라지지 않았으나, 단일 문제에 몰입하는 것이 최적의 답인지에 대해서는 반문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또 폴 그레이엄은 소프트웨어 시대에는 코드를 읽고 쓸줄 아는 해커가 가장 훌륭한 기업가라고 했지만, AI 라는 생산수단을 가장 잘 소유하는 자가 기술적 이해도를 기준으로 정렬되는 지에 대해서는 생각해볼만한 지점이 있습니다.

자본 구조

기업 구조와 사업 운영방식의 변경은 자본 조달 및 운용 구조를 변경시킵니다. 최근 잘나가는 AI Native 기업들은 이전 세대 스타트업과 달리 데스밸리를 경험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소수 인력으로 매출 성과를 발생시키기에 초기 자본에 대한 니즈가 다르며, 심지어 Midjourney와 같은 기업은 VC 투자를 받지 않겠다고 공언하기도 했습니다.

만약 돈이 필요하더라도 인건비를 위한 자본 조달 수요는 적고, GPU 및 컴퓨팅 파워 등 변동비적 성격의 수요가 커지면서 돈 대신 GPU를 받는 모델도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새로운 생산구조, 새로운 자본

아직 표준이라고 할 수 있는 'AI Native 기업'의 생김새가 제시된 것은 아니지만, 확실한 것은 기존의 인터넷 및 소프트웨어 스타트업과는 다른 모습이 관찰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생산구조가 변경되는 것이 맞다면 자명하게 자본이 운용되는 방법 역시 변경되어야 할테지요. 투자은행 방식의 부활일지, VC의 최적화일지, 혹은 크립토씬에서 있었던 것처럼 전혀 다른 방식의 등장일지는 모르겠으나, 굉장히 보기 드문 변화를 마주하고 있음은 자명해보입니다.

AI 시대의 자본은 어떻게 흘러야 할까요? 앞으로 낭투파의 다른 아티클을 통해 다양한 앵글로 다뤄보도록 하겠습니다.

김낭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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