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프란시스코의 커뮤니티 르네상스와 해커하우스 3.0
왜 누군가는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고, 누군가는 똑같은 일상으로 돌아와서 YC 지원서만 끄적이는가?
돌아온 샌프란시스코의 중력장
지난 3년간 초기 투자를 집행하며 관찰한 가장 큰 트렌드 중 하나는 단연 한국 창업가들의 샌프란시스코 진출입니다.
이것은 비단 한국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실제로 숫자를 봐도 SF는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하게 전 세계의 인재들을 빨아들이고 있거든요. 몇 년 전의 공동화가 무색하게 2025년 SF의 오피스 임대 활동은 전년 대비 66.7% 급증했으며, 전체 공실률은 여전히 높지만 AI 관련 지역(SOMA, Hayes Valley)만큼은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빠르게 채워지고 있죠. AI라는 기술적 변곡점이 만들어낸 거대한 회귀 현상입니다.
실리콘밸리의 철학자 Naval Ravikant의 AngelList가 운영하는 Founders Cafe에 모인 창업가들
하지만 이주자에게 SF는 여전히 가혹한 도시입니다. 월 $3,000에 육박하는 살인적인 월세, 그리고 이방인으로서 겪는 정보 비대칭과 고립 때문입니다.
실제로 꿈에 부풀어 떠난 많은 창업가들이 원하는 것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옵니다. 분명 미국에 있는 동안 알 수 없는 고양감은 느꼈던 것 같은데, 그래서 이제 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할지는 여전히 막막한 기분을 느끼는 것이죠. 그러다 한정적인 체류 기간과 현금 잔고에 쫓겨 귀국하고 나서는, 다시 한국에서의 삶에 치이게 됩니다. 미국 진출의 꿈을 포기하거나, "역시 한국은 답이 없어"라는 말을 되풀이하면서도 정작 하루하루는 달라지지 않은 채 YC나 Speedrun 지원 시기만 오면 습관처럼 지원서를 내밀곤 합니다.
반대로 명확한 인생의 전환점을 만들고 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꿈을 꾸게 되고, 지난 1년보다도 더 밀도 있는 한 달을 보내고 돌아와서는 이전과 완전히 다른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이런 차이는 왜 발생하는 것일까요? 이 답을 찾기 위해 베이스벤처스에서 극초기 창업팀에 투자하는 VC로서 최근 2년간 5번의 출장을 다니며 수많은 창업팀을 만났습니다. 결론적으로 저는 그 답이 '사람의 차이'보다는 '경험의 차이'에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마치 스타트업의 고객들이 경험하는 "Aha Moment"처럼, 특정 경험을 한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집단보다 확실히 유의미한 변화를 만들고 왔거든요. 제가 발견한 핵심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당신은 샌프란시스코에 머무는 동안 공동체에 진정으로 소속되는 경험을 했나요?”
공동체, 혹은 커뮤니티라고 하면 우리는 YC 같은 액셀러레이터를 먼저 떠올리곤 합니다. 하지만 막상 현장을 발로 뛰어보니 생각보다 훨씬 다양한 층위의 커뮤니티가 존재했습니다. 예시적으로:
- 라운지형 커뮤니티(Founders’ Cafe by AngelList 등): 추천제로 운영되며 자유롭게 출입 가능
- 초단기 배치프로그램(Artifact by Founders’ Inc 등): 투자와 지분을 요구하지 않는 5주간의 스프린트 프로그램
- 해커 하우스 (The Residency, Mission Control 등): 3개월~6개월 동안 창업가들이 함께 먹고 자며 생활하는 주거형 커뮤니티



샌프란시스코의 다양한 커뮤니티들을 직접 발로 뛰면서 만나봤고, 또 EO와 함께 직접 만들고 있습니다. (좌) The Inventors Residency (중간) Mission Control (우) EO House
이 중 오늘은 개인적으로 가장 밀도 있게 사람들의 인생을 바꿔 놓는 경험을 제공한다고 느낀, 해커하우스(Hacker House)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흔히 해커하우스는 ‘검약한 창업자들이 모여서 같이 일하고 사는 쉐어하우스’ 정도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현상의 이면에는 월세 절감 이상의 깊은 역사와 맥락이 흐르고 있습니다. 해커하우스는 언제 처음 시작됐고, 대체 이것의 본질은 무엇이며, 왜 오늘날 다시금 실리콘밸리의 중요한 키워드로 떠올랐는지. 그 기원과 본질을 탐구해보고자 합니다.
샌프란시스코 해커 하우스의 역사
우리가 흔히 말하는 해커하우스는 지난 20년간 실리콘밸리의 기술 주기와 자본의 흐름에 맞춰 세 번의 세대 진화를 거쳤습니다.
1세대 (2006~2015): 낭만의 시대 (The Organic Era)
해커하우스의 기원은 2006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NASA Ames 연구 센터의 엔지니어들이 쿠퍼티노의 대저택을 빌려 시작한 'Rainbow Mansion'이 그 시초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창업자인 Chris Kemp(훗날 NASA CTO 역임)를 비롯한 엔지니어들은 단순한 주거 공유를 넘어, 실리콘밸리 히피 문화와 오픈소스 정신을 결합한 '의도적 공동체(Intentional Community)'를 지향했습니다. 2012년 설립된 '20Mission' 역시 비트코인 초기 투자자들이 모여 블록체인의 미래를 토론하던 성지였죠.


(좌) Rainbow Mansion에서 진행 중인 NASA Hackathon (우) 20mish의 거주자들
이 시기의 해커하우스는 영화 <소셜 네트워크>가 심어준 '후드티 입은 해커'의 판타지와 맞물려 전성기를 맞습니다. "잠은 죽어서 자라"를 외치며 좁은 방에 2층 침대를 욱여넣고 코딩하는 것이 일종의 훈장처럼 여겨졌으니까요. 하지만 전문적인 운영 주체가 없다 보니 늘 위생 문제와 시 당국의 불법 개조(Zoning) 단속에 시달려야 했고, 그저 '젊은 날의 치기' 정도로 치부되기도 했습니다.
2세대 (2016~2021): 자본 유입, 그리고 실패한 기업화 (The Capital Failure)
1세대의 가능성을 본 부동산 자본이 유입되면서 양상은 달라집니다. WeWork의 성공을 목격한 투자자들은 주거 시장에서도 똑같은 플레이가 가능하리라 믿었습니다. 2016년 HubHaus, Starcity, WeLive 같은 기업들이 수백억 원의 VC 자금을 등에 업고 등장했죠. 이들의 모델은 전형적인 '마스터 리스 차익거래(Arbitrage)'였습니다. 대형 주택을 장기 임대해 방을 쪼개고, 힙한 인테리어와 청소 서비스를 더해 비싸게 재임대하는 방식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시도는 처참하게 실패했습니다. HubHaus는 2020년 파산하며 집주인과 세입자 모두에게 피해를 안겼죠. 가장 큰 패착은 "커뮤니티는 공장에서 찍어낼 수 없다"는 사실을 간과한 데 있습니다. 1세대 해커하우스의 핵심은 허름한 침대가 아니라 그 안에 흐르던 '동료애(Camaraderie)'였습니다. 하지만 2세대는 이를 '편리한 앱'과 '호텔급 서비스'로 대체하려 했죠. 설상가상으로 팬데믹으로 공실이 발생하자 낮은 마진율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졌습니다.
3세대 (2023~Current): 부족주의의 부활 (The Neo-Incubator)
그리고 지금, AI 붐과 함께 등장한 3세대 모델은 2세대의 실패를 철저히 복기하며 등장했습니다. 이 시기의 가장 큰 특징은 지식의 유통기한이 극도로 짧아졌다는 점입니다. Zoom이나 Slack같은 온라인 협업 툴로는 따라갈 수 없는 현장의 속도와 암묵지(Tacit Knowledge)가 중요해지면서, SF의 헤이즈 밸리(Hayes Valley)는 아예 'Cerebral Valley(뇌의 계곡)'로 리브랜딩되기에 이릅니다.
이 흐름 속에서 3세대 해커하우스는 비즈니스 모델을 임대업(Rent-seeking)에서 투자업(Equity-seeking)으로 완전히 전환했습니다.
그 변화의 시작점에는 2020년 설립된 'HF0(Hacker Fellowship Zero)'가 있습니다. Dave Fontenot은 아예 '해커 수도원(Hacker Monastery)'이라는 개념을 도입했습니다. 12주 동안 청소, 빨래, 식사, 영양제까지 모든 것을 제공하니 "오직 코딩만 하라"는 것입니다. 이들은 선발된 팀에게 $500k~$1M (Uncapped SAFE)를 공격적으로 투자하며, YC보다 더 높은 밸류에이션으로 연쇄 창업가들을 끌어들였습니다. 주거가 투자의 수단이 될 수 있음을 증명한 첫 사례죠.

2023년, 생성형 AI 붐과 함께 이 모델은 샌프란시스코 헤이즈 밸리(Hayes Valley)로 집결하며 폭발합니다. 그 진원지가 바로 'Genesis House'입니다. 21개의 침실을 가진 빅토리아 양식 저택에서 매일 밤 데모데이(Demo Day)가 열리며, 이곳은 AI 혁명의 최전선 실험실이자 'Cerebral Valley(뇌의 계곡)'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이 흐름은 'AGI House'에 이르러 하나의 거대한 '살롱(Salon)'으로 진화했습니다. Rocky Yu가 창업한 이곳은 단순 거주 공간을 넘어 Eric Schmidt(전 구글 회장), Marc Andreessen(a16z) 같은 거물들이 드나드는 이너 서클이 되었습니다. 철저한 '능력주의(Merit-based)'로 입주자를 선발하고, 자체 펀드(AGI House Ventures)로 직접 투자까지 집행합니다. 이제 해커하우스는 단순한 숙소가 아니라, 실리콘밸리식 도제 교육과 자본이 결합된 가장 강력한 네오 인큐베이터(Neo-Incubator)가 된 셈이죠.
3세대 해커하우스의 진정한 의미, 그리고 당면 과제
앞서 살펴보았듯이, 창업가들이 모여 살기를 택하는 이유는 복합적입니다.
- 생존 본능 (Economics): 물론 시작은 생존입니다. 샌프란시스코의 살인적인 렌트비는 초기 스타트업에게 치명적입니다. 혼자서는 감당 불가능한 Burn rate를 낮추기 위해, 그들은 본능적으로 뭉치는 것을 택했습니다.
- 정보 비대칭의 해소 (Information Asymmetry): AI 시대 기술의 발전 속도가 극도로 빨라지면서 정보의 유통기한은 초 단위로 짧아졌습니다. 가장 최신의 시도들과 정보들은 너무 빨리 변하고, 집단적으로만 겨우 따라갈 수 있습니다. 또 이주자로서 어느 로펌이 비자를 잘 해결하는지, 투자유치 전략은 어떻게 짜야 하는지와 같은 로컬 컨텍스트에 대한 정보는 오직 현장의 커피챗과 디너 파티에서만 암묵지로서 돌 뿐, 인터넷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 더 큰 야망, 더 빠른 성장을 부추기는 동료 집단 (Talent Density & Peer Pressure): 가장 중요하고 본질적인 이유입니다. 태초의 해커하우스와 마찬가지로, 결국 3세대 해커하우스에서도 집단적 몰입과 연결로부터 나오는 커다란 시너지와 검증 시스템이 핵심입니다.
- 몰입(Immersion): 24/7 제품 개발 스프린트가 가능합니다. 밥 먹고 제품 개발만 하는 환경에서는 나태가 스며들 틈이 없습니다. 특정 섹터의 창업가들을 타겟한 하우스의 경우 더 큰 시너지가 발생합니다.
- 연결(Access): 선배 창업가들과 알음알음 찾아오는 엔젤 투자자들과의 자연스러운 접점은 돈으로 살 수 없는 자산입니다.
- 검증(Verification): 투자자 입장에서 가장 확실한 실사는 1시간의 미팅이 아닙니다. 3개월간 함께 살며 서로가 서로의 레퍼런스가 되어주는 환경보다 강력한 검증 장치는 없습니다.


Cursor의 회사 풍경
전 세계 개발자들의 생산성을 혁신하고 있는 AI 코딩 도구, '커서(Cursor)' 또한 마치 해커하우스 스타일의 일하는 문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개발자는 원격 근무를 선호한다"는 통념과 반하게, 팀의 오피스 출근율은 무려 86%에 달합니다. 슬랙의 텍스트보다 칠판 앞에서의 대화가 압도적으로 빠른 '구두 중심 문화(Spoken-word Culture)' 때문입니다. 이들은 주 6일 출근하며 매일 사내 셰프가 차려주는 점심을 함께 먹으며 문서화되지 않은 '암묵지(Tacit Knowledge)'를 나누고, 전 직원이 한자리에 모여 제품을 부수는 'Fuzz' 세션을 통해 서로의 기준을 동기화합니다. 결국 최고의 인재들에게 물리적 공간이란 단순한 일터가 아니라, 서로의 몰입을 전염시키고 제품의 밀도를 극한으로 끌어올리는 가속기인 셈입니다.
하지만 분명히 해결해야 하는 과제도 있습니다. 1세대는 관리 소홀로, 2세대는 수익성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듯이, 3세대 역시 가치를 꾸준히 제공하기 위해 지속 가능한 시스템을 고안해야 하죠.
이를 위해 비용을 최적화하고, 자체적인 서비스 모델을 고안하고, 펀드를 만들어서 지분 가치의 상승으로 재원을 마련하는 등의 시도들이 이루어지고 있기는 합니다만 아직 온전히 작동하는 것인지 이야기하기에는 다소 이른 감이 있습니다. 특히 인재 밀도 관리가 무엇보다 중요한 상황에서 소중한 지분을 가져가면서도 최고의 창업가들을 꾸준히 유치해 내려면, 단순한 주거 지원과 애매한 네트워크 제공은 설득력을 가지기 어려울 것입니다. 결국 여느 비즈니스와 마찬가지로, 해커하우스가 지속 가능하려면 압도적인 가치를 증명해내야만 할 것입니다.

글로벌 인재밀도의 최전선에 진입하려는 분을 찾습니다.
한국의 창업가가 미국 시장에 진출한다는 것은 델라웨어에 법인을 세우는 행정 절차가 아닙니다. 다만 이는 실리콘밸리라는 거대한 지성체가 가진 압도적인 밀도와 속도에 나의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을 동기화시키는 과정입니다.
여러 커뮤니티와 배치프로그램, 그리고 해커하우스는 그 동기화를 위한 가장 효율적인 인터페이스일 뿐입니다. 결국 실리콘밸리로 향하는 것의 본질은 살아 숨쉬는 정보를 나누며, 함께 꿈꾸며 몰입할 수 있는 최고의 인재들과 연결되어야 의미가 있습니다.
낭만투자파트너스는 이 현상을 단순 주거 트렌드가 아닌, 글로벌 인재 자본이 재배치되는 구조적 변화로 바라보며 연구하고 있습니다. 비단 해커하우스라는 표면적인 현상에 대한 관찰을 넘어서, 앞으로도 전세계의 인재들이 이 거대한 중력장 안으로 가장 빠르고 안전하게 진입할 수 있도록 돕는 방법론을 다방면으로 고민하고자 합니다.


EO House 풍경. 영어가 아닌 언어를 쓰면 국적/나이/성별과 무관하게 즉시 푸시업을 해야 하는 것이 house rule.
동일한 맥락에서, 베이스벤처스에서 EO와 함께 글로벌 벤처펀드 "패트리어트 펀드"를 결성과 더불어, 샌프란시스코 Fisherman's Wharf 근처에서 창업가들이 함께 영어로만 소통하며 몰입해서 일하고 운동하는 EO House라는 커뮤니티를 함께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현재는 추천을 통해서만 입주자를 받고 있어요.
직접 커뮤니티를 빌딩하고, 샌프란시스코 이곳저곳을 발로 뛰면서 얻은 정보들을 나누고 싶습니다. 비단 EO House 뿐만 아니라 미국 내 여러 커뮤니티들에 진입점을 만들고 싶은 분은 연락 주세요!
Build your own, Bloom together
* Contact : 낭만투자파트너스 팀 (team@romanceip.xyz), 안재구(jae@bass.vc)
* LinkedIn: https://www.linkedin.com/in/jaegu-a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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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EO의 조혜리님이 직접 발로 뛰며 취재한 Inside Hacker Houses 시리즈도 EO매거진에 연재 중입니다. 생생한 이야기 한가득이니 많은 관심 부탁드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