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키가 폭리를 취하는 리셀러를 방관하는 이유 (feat. 나이키의 WEB3 )

나이키는 이미 커뮤니티를 통해 가치를 창출하는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이 WEB3 생태계의 다크호스로 부상할 것이라 기대하는 이유죠.

나이키가 폭리를 취하는 리셀러를 방관하는 이유 (feat. 나이키의 WEB3 )

혹시나 제 글을 좋아해주시는 분이 있다면, 다양한 산업 내 Community-driven 비즈니스의 가능성에 대해 지속적으로 얘기해왔음을 아실 겁니다. 투자자라는 직업을 갖고 있는 사람으로서 이 영역을 주목하는 이유는 당연히 '돈이 되기' 때문이죠. 기존의 글에서는 여러 사례들을 보며 Community-driven 비즈니스를 구체화하는 작업을 했다면, 향후 몇 편의 글을 통해 Community-driven 비즈니스가 실질적으로 가치를 창출하는 방식, 즉 돈을 만들어 내는 방식에 대해 소개해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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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키가 '진짜 WEB3'의 다크호스로 기대되는 이유

지난 글을 통해 나이키의 WEB3 플랫폼 'Dot Swoosh'를 소개하며, 진짜 WEB3와 가짜 WEB3를 구분지을 필요가 있다고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다소 공격적으로 들릴 수 있지만, 요약하자면 커뮤니티 중심의 프로토콜을 만들겠다고 선언하는 크립토 프로젝트의 95% 이상은 '단타 목적의 토큰 가격 상승에 집중하는 중앙화 프로토콜'에 불과하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나이키의 WEB3 플랫폼을 소개하며 '나이키라면 조금 다를 수도 있어!'라는 기대감을 내비치기도 했고요.

나이키가 WEB3의 새로운 표준을 제시할 수도 있다고 기대하는 가장 큰 이유는 (크립토, 메타버스, 블록체인 같은 시끄러운 단어들은 배제하고) 나이키는 이미 Community-driven 비즈니스가 어떤 부가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는지 가장 잘 이해하는 회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나이키가 한정판 스니커즈 시장을 다루는 방식을 보며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해보겠습니다.

22만원 주고 산 145만원짜리 운동화

개인적으로 한 때 스트릿 패션에 대한 관심이 컸습니다. 네이버 스노우의 크림을 필두로 한 리셀 플랫폼의 등장과 함께 국내에서도 스니커즈 리셀 시장은 폭발적으로 성장하던 시기에 관심은 더욱 증폭되었습니다. 하지만 수 십 만원에 달하는 가격을 지불하고 신발을 살 마음의 준비는 안되었기에, nike.com 에서 하는 한정판 스니커즈 드로우에 신청해보기 시작했습니다. 나이키매니아 같은 커뮤니티를 보면 '1년 내내 신청해도 한 족도 못 얻는다', '100번 신청했더니 드디어 한 번 당첨되었다' 등 당첨 확률이 극악이라는 이야기가 많았기에 큰 기대는 사실 없었습니다.

그런데 운이 좋게도, 무려 단 일곱 번 만에!

일본의 명품 패션 브랜드 'Sacai'와 협업한 스니커즈 '나이키-사카이 베이퍼 와플 블랙'에 당첨되었습니다. 여러 색깔을 동시에 신청했지만 운이 좋게도 가장 인기가 많은 블랙에 당첨되었습니다. 그리고..

발매 당일 즉시 4배 상승하여 80만원 수준에서 형성되었던 리셀 거래가는 지속적으로 올라 현재 140만원을 넘어섰습니다. 계속해서 오르는 가격을 보며 제 신발은 구매한 지 무려 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박스 속에 고스란히 보관하고 있습니다.

"팔기에는 아깝고, 신기에도 아깝네.."

꽤나 독특한 감정입니다.

시끌시끌 리셀시장

나이키가 만든 게임에 참여하다 보니 문득 궁금한 점이 생겼습니다.

"20만원 짜리 신발이 발매하자마자 2차 시장에서 80만원이 되는데 나이키는 왜 20만원을 고집하는거지?"
"리셀시장은 매년 폭발적으로 성장하지만 그 모든 떡고물은 리셀 플랫폼과 되팔이 업자들이 먹고 있고, 나이키는 매번 소비자들의 원성에 시달리는데 왜 단 한 푼도 가져가지 않는거지?"

실제로 스니커즈 매니아들의 커뮤니티에서는 폭리를 취하는 업자들을 지탄하는 글이 굉장히 많고, 나이키가 상품의 공급자로서 시장을 중재할 것을 요구하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지난 9월 나이키에서 '재판매를 위한 구매를 금지한다'는 이용 약관을 넣기는 하였지만 '재판매를 위한 구매'를 실질적으로 감지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해서는 내놓지 않으며 실효성 없는 조항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입니다. 나이키가 리셀 금지 조항을 신설한 이후에도 커뮤니티의 반응은 냉소적이었습니다.

‘28만9000원→1500만원’…나이키 ‘리셀 금지 조항’에 엇갈린 시선
“판을 다 깔아주고 이제와서 금지라뇨. 그냥 많이 만들면 ‘리셀’할 일도 없는데.” 나이키닷컴이 10월부터 리셀(재판매)용으로 제품을 구매
나이키 리셀 금지 조항에 대한 커뮤니티의 냉소적인 반응

심지어 이 조항을 만들기 이전까지 나이키는 리셀 시장에 대해 완전한 무대응 전략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매일매일 스니커즈 매니아들의 컴플레인에 시달리는 동시에 국내에서만 연간 5,000억원에 달하는 스니커즈 리셀 시장에서는 단 한 푼도 가져가지 않는 나이키는 대체 무엇을 얻어가고 있는 걸까요?

명품의 모습 갖추기

나이키가 한정판 스니커즈 시장을 만드는 방식을 이해하기 위해서 스니커즈를 만들고 판매하는 과정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나이키가 최초에 한정판 스니커즈를 생산하는 방식은 에르메스나 루이비통 같은 명품들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우선 나이키 스니커즈 라인 중에는 '조던', '덩크', '에어포스' 와 같이 상당한 인기를 끄는 시리즈가 존재합니다. 나이키는 이러한 스니커즈 포맷에 색깔, 패턴, 재질 등을 바꾸며 지속적으로 생산량이 정해진 한정판 시리즈를 생산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나이키 한정판 스니커즈의 퀄리티는 그다지 좋지 않은 것은 유명하죠. 착화감은 굉장히 안좋고, 봉제와 같은 디테일에서 불량이 있는 경우도 상당히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쁘고 희소하기에 사람들의 관심은 커집니다.

이러한 한정판 스니커즈가 명품의 지위에 올라갈 수 있도록 하는 나이키의 가장 중요한 작업은 '내러티브 씌우기' 입니다. 외부와의 콜라보레이션을 통하는 방식이 가장 일반적입니다. 트래비스 스콧, 지드래곤과 같은 아티스트와 협업하는 것은 물론이고 OFF-WHITE, Sacai, Fear of God 등 유명 스트릿 명품 브랜드들과 지속적으로 협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또한 종종 Ben & Jerry's(아이스크림 브랜드)와 같은 이종산업과의 콜라보도 진행합니다.

리셀가가 200만원에 달하는 트레비스 스콧 x 조던 1
아이스크림 브랜드 Ben & Jerry's와 협업한 덩크 시리즈

누구나 가질 수 있는 명품

이렇게 나이키가 재화를 생산하는 방식 자체는 일반적인 명품 업계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최초 발매하는 시점이 되면 나이키는 명품 업계와는 정반대로 움직입니다.누구나 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죠.

나이키의 한정판 스니커즈를 살 수 있는 방법은 쉽게 얘기하면 '선착순'과 '뽑기' 단 두 가지입니다. 나이키는 한정판 스니커즈의 발매 계획을 발표하고 두 방식 중 하나로 최초 판매를 진행합니다. 온라인 웹사이트에서든, 나이키 공식 오프라인 스토어에서든, 협업 관계의 편집샵에서든 소비자들은 '선착순' 혹은 '뽑기' 방식으로만 한정판 스니커즈 구매 경쟁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스니커즈를 살 수 있는 기회는 모두에게 열려있고, 공정한 방식으로 기회가 주어지는 형태이기에 스니커즈에 대한 약간의 관심만 있으며 이 게임에 가볍게 참여해볼 수 있습니다. 아무리 업자라 하더라도 이러한 시스템을 거쳐야 하는 것은 다르지 않습니다.

스니커즈를 사기 위해 나이키 홍대점 앞에 늘어선 행렬

판매 방식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나이키가, 극소수의 케이스를 제외하면, 최초 발매 가격을 국내 기준 18만원~22만원 수준으로 유지한다는 사실입니다. 얼마나 유명한 모델이든, 얼마나 인지도 있는 아티스트와 협업을 했든 모두 동일합니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발매 당일 저녁에 10배 이상 가격이 뛸 것이 확실시되더라도 발매가는 무조건 20만원 언저리에서 고정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한정판 스니커즈 판매 방식과 최초 발매가는 나이키 한정판 스니커즈 시장을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게임'으로 만들었습니다. 높은 가격이나 제한적인 멤버쉽을 통해 진입의 장벽을 세우는 일반적인 명품 브랜드들과는 정반대의 행보인거죠. 누구나 20만원만 있으면 한정판 스니커즈를 살 수 있습니다. 또한 누구든 동등하게 선착순에 들거나, 뽑기에 당첨되어야만 살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습니다.

나이키는 이렇게 스니커즈 커뮤니티의 잠재적인 크기를 극대화합니다.

그리고 등장하는 리셀러

나이키가 모든 사람들에게 접근의 기회를 열어두었다고 명품의 지위를 포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이키의 스니커즈는 커뮤니티 내 2차 시장에서 바로 다시 명품의 지위로 격상되는데, 여기서 균형 작업을 수행하는 것이 바로 리셀러입니다.

'한정 수량 생산' & '뽑기/선착순 & 저렴한 가격 판매' 방식을 통해 나이키가 내놓은 스니커즈는 발매 시점부터 공급보다 수요가 많은 불균형 상태에서 출발합니다. 리셀 플랫폼 및 리셀 업자들은 마켓 플레이스 혹은 사입 방식을 통해 시장의 수요-공급 불균형 상태를 해소할 수 있는 형태로 가격 조정을 시행합니다. 최초에 나이키가 설정한 스니커즈를 둘러싼 내러티브부터 생산량, 디자인 등이 시장 가격 결정 요소로 개입되며 시장에서는 최대 1,000만원 수준까지 실질 유통 가격이 결정되는 거죠. 이렇게 나이키가 일괄적으로 정한 20만원이 아니라 커뮤니티가 결정한 '진짜 가격표'가 각 재화에 붙게 됩니다.

경제학원론에서 말하는 초과수요 이론, 그 자체네요

공정한 경쟁 시스템을 거쳐 20만원에 구매한 신발은 순식간에 100만원이 넘는 상품으로 바뀌게 됩니다. 100억을 벌어도 신발에 100만원을 쓸 생각은 추호도 없는 저와 같은 사람도 순식간에 140만원짜리 신발을 갖게 되는 거죠.

나이키가 얻는 것 : Premium for Everyone

나이키는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 양가적인 효과를 동시에 가져갈 수 있습니다.

1) 나이키 스니커즈는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스트릿 패션 브랜드입니다. 문을 열어두었기 때문에 나이키가 만든 게임에 참여하는 사람의 수, 즉 잠재적 커뮤니티의 크기는 매년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습니다.

2) 동시에 나이키 스니커즈는 아무나 쉽게 접근할 수 없는 명품 브랜드이기도 합니다. 실질적으로 시장에서 유통되는 가격은 고급 명품 신발의 가격과 유사한 수준에서 형성되고 나이키 스니커즈는 프리미엄 브랜드 이미지를 갖습니다. 다만 이 가격은 나이키가 자체적으로 결정한 가격이 아닌 수요-공급 불균형에 의해 커뮤니티 내에서 결정된 가격이기에 가격 상승의 정당성이 확보됩니다. 특히 직접 개입할 경우 논란이 클 수 있는 이 과정은 외부 커뮤니티에 있는 리셀 업자에게 맡기기에 나이키는 본인 손에 흙을 묻히지 않습니다.

물론 미시적으로 보면 나이키는 재무적 이득을 놓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스니커즈를 10만원 더 비싸게 팔지도 않고, 2차 거래 수수료를 받지도 않으니까요. 하지만 나이키는 아래와 같은 flywheel을 통해 브랜드 가치를 제고하고 커뮤니티 engagement를 강화하면서 장기적인 관점에서 시장 파이를 키워나가고 있습니다.

When it comes to WEB3

다들 아시다시피 2021년은 NFT 시장의 활황기였습니다. 당시 출시된 대다수의 NFT 프로젝트가 제시한 기치는 궁극적으로 NFT를 중심으로 한 커뮤니티가 형성될 것이고, NFT 홀더들에게 혜택이 부여될수록 커뮤니티에 진입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며 NFT의 가치는 커질 수 있을 것이라는 굉장히 간단한 내러티브였습니다.

이러한 방식은 소위 '에르메스 방식'으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소수의 인원들이 고가의 NFT를 거래하고, 이 커뮤니티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가격을 지불해야만 하는 소위 '그들만의 리그' 메커니즘이죠. 물론 명품 브랜드의 사례처럼 실제로도 이러한 방식의 커뮤니티 빌딩이 작동할 수 있습니다. 다만 에르메스가 모두에게 추앙받을 수 있는 브랜드 가치를 쌓기까지 약 200년이 걸렸을 뿐입니다.

지난 글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나이키의 WEB3 프로젝트는 런칭 초반부터 기존 대다수 WEB3 프로젝트와는 다른 접근을 취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에르메스 방식'이 아닌 '나이키 방식'을 시장에 선보일 수 있지 않을까 기대가 됩니다. Dot Swoosh를 이끄는 Ron Faris가 나이키 스니커즈의 헤드 출신이라는 점은 더욱더 기대감을 증폭시키는 포인트네요 :)

감사합니다